1999. 1. 25.

『2000년, 이 땅에 사는 나는 누구인가(지성 23인의 자기성찰과 메시지)』, 푸른숲


전통과 현대의 실천적 접목


김  현



  전시회나 학술 세미나 등의 모임에 참석하여 구면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도중에 적어도 두 세 사람, 전에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을 소개받게 된다. 중간에 서서 양인을 소개해 주는 사람은 의례 상대방의 이름과  직장, 그리고 그 직장에서의 직위를 말해 준다. 어느 회사의 무슨 부장 아무개씨, 어느 대학의 아무개 교수 하는 식으로 말이다. 나에 대한 소개도 대개는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를 제3자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만든 김현’이라고 하는 사람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개는 사실 내가 무슨 특별한 일을 해서라기보다, 달리 언급해 줄 뚜렷한 소속이나 지위가 없어서이다. ‘서울시스템’이나 ‘한국학데이터베이스연구소’라는 이름을 누가 알겠는가?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낀다. 그런 식으로 소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의 실상이 무엇이든간에, 이 사회에서 김현이라는 사람의 아이덴티티가 그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로서가 아니라 그가 한 ‘일’로서 정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만족스러운 것이다

  나의 관심이 무엇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묻는 사람 앞에서 나는 아직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설명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전공이 ‘철학’인지 ‘정보공학’인지 묻는 질문에 나는 즉각적인 대답을 하지 못한다. ‘학문’을 하는지 ‘사업’을 하는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두 가지를 다 한다”고 하는 것은 주제넘은 이야기이다. “그 두 가지의 중간에 있는 것을 한다”고 하면 실상에 좀 더 가까울 것 같지만, 이는 내가 생각하기에도 모호하기 짝이 없는 답변이다. 이러한 문제는 결국 나로 하여금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잘라서 말하는 것을 회피하게 만들었다. 대신 나는 내 자신이 하루하루 해 가고 있는 일들을 말하기 시작했고, 그 일의 성격과 일의 주체인 나를 어떤 범주에 집어넣는가는 듣는 이의 판단에 맡기기로 하였다.


  한국철학, 좀 더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전통 철학의 한 분야인 조선 성리학(朝鮮性理學)을 전공으로 삼았던 나의 대학, 대학원 시절에 내가 보낸 시간의 대부분은 한문(漢文) 공부와 한문으로 쓰여진 고전 텍스트를 읽는 데 소비되었다. 전근대 시대에 형성된 우리의 전통 문화가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여전히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표면 의식에서는 잊혀진 듯이 보일지라도 잠재의식의 저변에 여전히 견고하게 자리잡아 한국인의 삶의 이곳 저곳을 규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시절 한국의 전통 문화와 현대 사회의 관계를 보는 나의 시각이었다. 현재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과거의 경험이 명백하게 우리의 표면 의식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날의 당위성에 맞추어 긍정적으로 조절될 수가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깡그리 잊은 듯 하지만 무의식의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는 감추어진 기억은 의식에 의해 통제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표면적으로 지향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이상 행동을 유발하기도 한다. 정신병리학에서 말하는 이러한 이론은 전통시대의 정신적 유산이 오늘날의 사회에서 긍정적인 민족 자아를 형성하기보다는 주체할 수 없는 인습의 굴레로 전락하고 만 데 대한 설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병증을 치료하는 방법은 잊혀진 기억을 잠재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르게 하는 것, 그렇게 함으로써 오늘의 당위와 조화를 이루는 방향으로 통제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전통 시대의 유산들, 그 중에서도 지적 사유의 자취는 예외 없이 한문으로 쓰여졌다. 현재의 우리를 알기 위해 과거의 우리를 살피는 것. 그 목표를 이루는 방법은 한문을 읽는 것 이외에는 없다고 여겨졌다.

  한문으로 쓰여진 문헌을 읽는 사이, 옛 것을 공부하는 고전 연구자들의 연구 방법에 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방대한 그 문헌들을 나보다 먼저 읽어 본 사람들이 있을 터였지만, 그들의 경험은 나에게까지 전달되지를 않았다. 그 대부분의 글들을 마치 내가 최초의 독자인 양 읽어야 했다는 것이다. 한문 문장은 한자의 뜻만 안다고 해서 읽혀지는 것이 아니다. 문맥에 따라 구두(句讀)를 해 내는 능력은 단기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특수한 분야의 용어들은 그 분야에 정통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묻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고전 연구자들이 자기가 수행한 독서의 자취를 성실하게 기록으로 남긴다면, 후학들은 보다 짧은 시간에 훨씬 많은 자료들을 접할 수 있게 되고, 그 만큼 우리의 전통 시대를 넓은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완벽한 번역이 아니라도, 한문 텍스트에 문장 부호를 부가하는 표점(標點)이라든가, 난해한 어휘에 대한 주석, 중요한 어구의 용례를 알게 하는 색인 등을 남기는 것은 그 문헌을 다시 읽은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를 받을 일이건만, 그러한 노력의 자취는 어디에서도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전통 학문의 연구는 그래서 여전히 어렵고, 우리의 옛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은 마냥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이 보이는 것이다.

  박사 과정을 수료할 즈음, 나는 전통 시대에 대한 지식의 내용을 심화시키는 노력을 잠시 접어 두고 그 지식의 생산성을 증진시키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컴퓨터라고 하는 정보 기기를 고전 연구에 접목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찾고자 당시의 한국과학기술원 시스템공학연구소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만 해도 컴퓨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그야말로 ‘컴퓨터(computer)’ 즉, 언어보다는 숫자를 다루는 기계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도입된 컴퓨터의 성능과 나의 컴퓨터에 대한 이해가 다같이 초보적인 수준에 불과했던 그 시기에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사실을 통찰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컴퓨터는 문자 교류(文字交流)의 새로운 매체가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종이 위에 쓰이는 정보는 손으로 쓰는 것이건, 활자로 인쇄하는 것이건 그 내용을 일정하게 고정시킨다고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한 번 쓰여지면 그 매체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내용과 형식이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다. 이 고정성은 문자 기록에 대해 일종의 실체성을 부여하게 된다. ‘글로 쓰여진 것이 갖는 권위’는 그 ‘고정성’에 기인하는 면이 많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반해 전자 매체에 담기는 문자들은 무상하리만치 변형과 수정에 개방되어 있다. 컴퓨터가 고전 텍스트의 연구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수단이 되리라고 생각한 이유는 바로 그와 같은 수정과 보완에 대한 개방성 때문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의 글이 전자 매체 상에 존재하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첫 단계에서는 이른바 백문(白文)이라고 하는, 구두점도 없이 한자만 빽빽한 글이 입력되었다고 하더라도, 다음 단계의 노력으로 글의 문맥을 확연하게 드러내 주는 표점 부호가 부가될 수 있으며, 그 문헌에 대한 연구의 심화에 따라 다양한 주해와 주석이 첨가될 수 있다. 활자본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가 간행된 지 수십년이 지나도록 수많은 연구자들이 그 책 속의 무수한 오자(誤字)와 씨름해야 했던 것과는 다른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방대한 규모의 고전 문헌들이 전자화 되었을 때 정보 검색이라고 하는 전자 매체 고유의 기능이 자료 찾기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단축시켜 준다는 사실은 고전 연구의 방법 자체를 변화시키는 결과도 초래할 수 있다. 인문학 연구자들이 차분히 앉아서 어떤 자료를 순차적으로 읽어 가는 것은 학생 시절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문 연구자로서 논문 쓰기의 부담을 안게 되면서부터는 고전 텍스트가 ‘읽는’ 목적보다는 ‘찾는’ 목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더 많다. 자기 논지의 예증이 될 만한 구절을 찾기 위해서 드넓은 문헌의 바다에서 이 구석을 들쳐보고 저 구석을 찔러보는 식으로 책장을 뒤적이며 소비하는 시간이 이른바 고전 연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전자화된 텍스트의 정보 검색 기능이 목적하는 바는 그러한 시간의 낭비를 줄임으로써 보다 창조적인 사유와 독서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전자 매체가 고전 연구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그 모든 일들이 나의 손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서서 그 일의 첫발을 내디딜 필요는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한 일들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손대야 할지 아는 사람이 적어도 한 사람은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시스템공학연구소에서의 6년 반의 시간은 나로 하여금 많은 것을 얻게 했다. 정보 공학의 각 부분에 대한 기초 지식을 비롯하여, 컴퓨터 하드웨어와 정보 통신 기술에 대한 이해, 프로그래밍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도 유용했던 조직적인 연구 개발 프로젝트의 수행 경험은 그곳에서 근무하는 동안 얻은 소득이었다. 동양의 고전을 효율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전산 응용 기술’은 어느 정도 내 능력의 범위 안에 들어 온 듯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컴퓨터와 정보 통신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깊어 갈수록 내가 의도했던 일들의 실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 보이는 것이었다. 컴퓨터 관련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 발달된 기술이 적용되는 곳은 투자의 효과가 즉각적으로 드러나는, 지극히 상업적인 분야로 국한되어 가고 있다. 고전 전산화에  관련된 어떤 기반도 조성되어 있지 않았던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그 사업은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요구되는 일일 수밖에 없었다. 여러 해 동안 꾸며 온 구상과 다듬어 온 요소 기술들은 구체적인 결과물로 이어졌을 때나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지 한낱 당위론에 머문다면 시작할 필요조차 없었을 일이다. 그것은 이론만으로도 의미를 가질 수 있는 학문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그 시점에서 나는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을 투자하여 제품을 만들어 내는 일은 기업에서 담당할 수 있는 일이다. 상업성이 있는 일이라면 기업들이 서로 나서서 사업 제안을 해 오겠지만, 이 일에는 그와 같은 유인(誘因) 요소가 없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서울시스템주식회사의 이웅근 회장을 만나 그 회사의 다른 사업 분야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어 내는 데 기여할 것을 조건으로 고전 자료 데이터베이스의 사업화를 제안하였다.

  1992년 가을 서울시스템으로 자리를 옮긴 직후, 한국학 연구 자료 중 가장 방대한 규모라고 할 수 있는 『조선왕조실록』의 데이터베이스화를 목표로 기술적인 인프라(Infrastructure, 기반 기술)를 구축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새로운 문자 부호계의 제정, 2만여 자의 한자 서체(書體) 제작, 데이터 편집 프로그램의 개발, 검색 엔진의 구현 등의 일에 50여 명의 기술 인력이 한꺼번에 동원되었다. 개발 과제 자체가 기존에는 없던 일이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프로그램을 새로운 개념으로 설계하고 구현해야 했다. 데이터의 분류, 입력과 편집, 교정 단계에서는 400여 명의 인력이 동시에 투여되었고, 데이터 검증을 위해 출력한 교정지의 매수는 A4 용지 100만 매에 달하였다.

  단행본 413권의 분량의 텍스트와 전문 검색 색인, 운영 프로그램과 디지털 서체를 포함한 『국역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CD-ROM의 초판은  사업 착수 3년 만인 1995년 10월에 첫 선을 보였고, 32만 개의 기사에 대한 분류 색인을 부가한 개정판의 간행은 그로부터 2년 후에 이루어졌으며, 번역 작업까지 수반한 『고종․순종실록』 CD-ROM은 1998년 봄에 완성되었다. 10여 년 전의 구상이 이론에 머물지 않고 부분적으로나마 현실화 된 것이다.

  이 결과물의 공익적인 면에서의 성공 여부는 차치하고, 그것이 상업적으로도 성공했는지에 대해 언급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상품 판매를 통해 얻은 수익이 개발비에 형편없이 못 미쳤다고 하는 점에서는 실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계산법은 조금 다르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 개발에 투자된 금액은 전적으로 그 제품 하나를 위해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 동양 고전 자료의 전산화를 위한 범용적 인프라의 개발에 투여된 부분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앞으로 유사한 개발 사업이 지속적으로 시행될 경우 그 비용은 『실록』의 경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절감될 것이다. 이윤의 발생은 처음부터 의도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사업이 자생력을 가질 정도의 수익은 반드시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고, 그것은 가까운 시일 내에 가능해지리라고 확신하는 것이다.

  현대어로 번역된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의 개발에 이어서 요즈음 내가 전념하고 있는 일은 국사편찬위원회와 공동으로 추진하는 『원전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의 편찬이다. 이 일은 한문 텍스트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내가 생각했던 고전 전산화의 본래 의도에 더 부합하는 일이고, 또 『국역 실록』의 개발보다 앞서서 착수된 것이었지만, 데이터 편찬 업무의 어려움으로 인해 아직까지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데이터베이스의 제작에 대해 굳이 ‘편찬(編纂)’이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똑같은 내용의 정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단행본 책자로 간행될 때와 TV 방송 프로그램으로 제작될 때 그 표현 형태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컴퓨터를 통해 열람되도록 전자 매체에 수록하는 지식의 형태가 활자를 쓴 서책(書冊)에 기록된 형태와 같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이유이다. CD-ROM이나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되는 정보는 그 매체가 주는 새로운 가능성과 한계 내에서 정보의 전달 효과를 극대화하는 새로운 형태로  가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문 정보의 전자화를 위한 정보 편찬은 중국․일본에서도 그 연구가 극히 미미하며, 국내에서는 그야말로 전무한 상태이다. 『원전 조선왕조실록』의 데이터베이스 개발 연구는 바로 국내에서 최초로 시행되는 ‘한문 텍스트의 전자 편찬 사업’이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원전 실록』의 글자들을 그대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정도로만 계획했다면, 벌써 수년 전에 마무리되었을 일이다. 그러나 어차피 적지 않은 노력이 투여되어 나오는 이 저작물이 단순히 한자의 키펀칭에 불과할 경우, 우리의 한문 고전이 21세기의 전자 매체 속에 어떻게 담겨야 할 지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원점에 머물고 말 것이다.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표점과 마크업 기호를 부가하는 작업에 대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았지만, 앞으로 2년 후 전자화된 『원전 조선왕조실록』이 CD-ROM이나 인터넷 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될 때, 그런 반론은 일순간에 불식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16 종의 표점(標點) 기호와 더불어 인명(人名)은 녹색, 지명(地名)은 하늘색, 서명(書名)은 분홍색, 연호(年號)는 갈색, 원주(原主)는 회색으로 표시하는 색상의 대비가 한문 문장의 문맥을 상세하게 드러내 주고, 모든 글자와 어휘의 검색과 통계 처리가 가능한 이 전자 문서는 뉴미디어 시대의 한문 텍스트로서의 전범을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방식이 ‘한문  텍스트의 전자 편찬’에 대한 궁극적인 표준이 될 것이라고는 자신하지 않는다. 그것은 최초의 시도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문제점을 드러낼 것이고, 표점의 정확성에 대한 비판도 거셀 것이다. 하지만 그 문제점과 비판은 다음 단계로의 발전을 위한 초석이 된다. 비판의 여지없이 옛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보다는 훨씬 건설적인 일임에 분명한 것이다.


  내가 처음 고전 자료 전산화의 방법을 세우고자 전산 분야에 뛰어들 때에는 그 일에 3 년 정도만 종사할 것을 예정했고, 서른 살부터는 다시 전통적인 고전 연구자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제기된 새로운 문제와 일거리들은 나의 30대를 컴퓨터 앞에 묶어 두고 말았다. 이 기간 동안 한국철학 연구자로서의 역할에는 그다지 충실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전자 매체에 담아 온 컨텐츠는 예외없이 전통 학술에 관련된 것들이었고, 또 그 대부분이 조선시대의 역사에 관한 것이었던 만큼, 나는 그 일을 통해서도 우리의 전통시대의 구체적인 면면과 그 저변의 의식 구조에 대한 다양한 지식을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과거 역사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분명하게 체감된 사실은 ‘아직도 우리 사회의 너무도 많은 부분이 조선 시대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었다.

  몇 해 전부터 여러 대학과 정부기관에서 한국학 자료 전산화 사업을 추진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한 번은 모 기관으로부터 그 방법에 대한 자문을 부탁받은 적이 있다. 나는 첫 번째 제안으로, ‘한국학과 정보 시스템 양쪽을 깊이 있게 아는 사람으로서 프로젝트의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이를 소개하겠다’고 하였다. 대답은 ‘외부 사람을 책임자의 자리에 앉힐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방법으로, 비록 고전 문헌에 대해 공부한 적은 없지만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 온 실무자로서 인문과학 분야의 응용에 대해 적극적인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을 기술인력으로 채용하라고 했다. ‘전공이 다른 사람들을 쓸 수는 없다’는 대답이었다. 세 번째, 외부에서 사람을 데려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내부 인력을 정보화 관련 전문 연구기관이나 기업에 파견해 정보화에 관한 기초적인 소양이라도 배울 수 있게 하라고 했다. 그 제안마저 ‘인문과학 연구자들에게 어떻게 기술적인 일을 배우라고 시키겠느냐’고 일축하였다.

  결국 아무런 조언도 되지 못한 그날의 대화는 그야말로 박지원(朴趾源)이 쓴 「허생전」의 줄거리를 그대로 반복한 격이었다. 변부자로부터 허생의 이야기를 들은 조정 대신 이완은 그의 집을 찾아가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는 방법을 물었다. 허생은 제갈공명(諸葛孔明)과 같은 인재를 추천한다면, 임금으로 하여금 삼고초려(三顧草廬)하게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어렵다는 대답이었다. 허생은 차선책으로, 명(明)이 망한 후 우리나라에 숨어든 중국의 유능한 인재들을 대우하여 등용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불가능하다는 대답이었다. 허생은 마지막으로, 청(淸) 나라에 간첩을 보내어 청국인과 어울리면서 세력을 신장시키고 궁극에는 그 나라의 실권을 거머쥐게 하라고 하였다. 이완은 ‘예의를 숭상하는 조선의 사대부가 어찌 오랑캐 차림을 하고  그들과 어울리겠느냐’고 거절하였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우리의 선조들이 변화해 가는 세태에 그렇게 둔감했던 것도 아니며, 국가의 위난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박약했던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새로워져야 할 시기에 새로워지지 못하고 왕조마저 마감하게 된 것은 오랫동안 숭상해온 가치 질서가 무너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우리의 선조들이 지키려 했던 것의 근본 정신은 예의(禮義)와 염치(廉恥). 그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아도 결코 무가치한 것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 현대 한국의 사회 질서를 지탱해 주고 있는 대들보는 해방 이후에 제정된 법조문들이 아니라, 예의 염치를 외면하지 못하는 전통적 윤리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나무랄 수 없는 윤리적 가치를 폐쇄적인 신분질서, 허구적인 화이관(華夷觀)과 함께 꽁꽁 묶어 두고, 하나가 무너지면 다 무너진다고 생각했던 데서 전통은 인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IMF 시대라는 말로 표현되는 경제 위기를 맞은 요즈음 어느 곳에서나 들리는 소리는 구조 조정을 해야 한다느니, 개혁을 통해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느니 하는 말이다. 그러나 개혁의 조짐은 보이지 않은 채 혼란만이 가중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인가?  개혁의 결실로 얻어질 수 있는 것을 욕심내고 있을 뿐, 그 개혁을 이루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을 어느 것도 버리려 하지 않는 모순적인 사고가 여전히 우리의 의식 속에 잔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의와 염치를 숭상하고 학술과 문화를 사랑해 온 한국인의 지적 전통이  변화를 가로막는 족쇄가 되지 않고 바람직한 발전의 추진력이 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현대인들의 눈앞에 그 지적 전통의 유산을 온전히 드러내어 거기에 내재된 진정한 가치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게 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변함없는 생각이다.


  나는 우리의 과거를 제대로 알기 원하는 우리 사회의 지적 수요가 결코 작지 않다고 확신한다. 뉴미디어는 그러한 지적 수요에 효과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유용한 수단이다. 현대의 지식산업은 정보 기술과의 접목을 통해 서 그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으며, 전통 문화에 대한 지식과 정보 또한 그 점에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의 전통문화의 연구자들이 조선시대 선비들과 똑같은 사고방식을 가지고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하나도 바꾸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전통 문화는 현대 사회의 새로운 지식 매체에 적응하는 데 실패할 것이고, 우리의 것에 대한 수요는 더 이상 확산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지적 유산을 현대 사회의 지식 매체에 전이시키는 일은 고전에 관한 애정과 식견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정보기술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추적하고 있는 과학기술인력과의 유대가 필요한 것이다. 단, 두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 달에 한 두 번 만나 이야기를 주고받는 식의 유대는 생산적인 결과를 낳을 수 없다. 당위론만을 낳을 뿐 실천에는 전혀 접근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의 실현을 위해서는 박지원이 이야기한 바대로, 명나라 이민자를 조선의 문벌 자제와 혼인시키거나, 양반이 상투를 자르고 청나라 사람이 되는 식의 적극적인 교류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서울시스템의 ‘한국학 데이터베이스 연구소’라는 조직 안에서 행한 일은 바로 그와 같은 적극적인 교류의 실험이었다. 10 년 이상 컴퓨터에 대해서만 배우고 프로그램만 개발해 온 전산 기술자와 그 이상의 기간 동안 한문 사료에만 매달려온 역사학도, 한문학도들을 한 방에 모은 채,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상대방의 일을 배우고 나의 주장을 상대에게 이해시키는 과정을 거치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데이터베이스는 그러한 적극적인 학제간(學際間) 교류의 산출물이었다.

  나의 학제적 실험은 아직 그 결과가 미미하여 내세울 것이 없지만, 우리 사회의 여러 곳에서는 나보다 몇 배 창의적이고 진취적으로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볼 수 있다. 목소리 높여 사회 모순을 성토하면서 이것도 저것도 모두 뜯어고쳐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도, 그 이것과 저것의 가치 있는 요소들을 조용히 결집시켜 구체적인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야말로 한국의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겨진다. 전통적인 미감을 현대적인 디자인 상품에 되살리는 사람, 한의학의 유산을 식품공학에 응용하려는 사람. 비즈니스맨들의 점심시간을 공연 예술의 현장과 엮으려는 사람, 첨단과학의 이론을 현실 수요에 맞추기 위해 벤처 기업을 만드는 젊은이들 ....

  이미 만들어진 틀 속에 안주하여 지위와 명예를 탐하기보다는 그 틀의 사이사이에서 없던 것을 만들어 내는 이들은 이제 결코 소외된 소수가 아닌 듯하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려는 신세대들 중에도 그들의 일을 선망하고, 그것에 참여하려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희망과 포부를 가진 후배들에게 한 두 가지 조언을 한다면, 이러한 말들을 전하고 싶다.

  첫째, 이것저것 곁눈질한 정도의 어설픈 지식으로는 전공의 벽을 넘나드는 학제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두 가지 분야를 함께 아우르는 것은 50%와 50%의 결합으로는 부족하다. 각각의 분야 모두에서 전문가로 인정받을 만한 지식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비록 중간 영역에서 일을 한다고 해도 그 일의 성과를 수용하는 사람들은 자기 분야의 전문적인 기준으로 그것을 평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것은 살아남기가 힘들다.

  둘째, 기존 체제의 한 분야에서 매진해 온 사람들이 얻는 지위와 권위를 욕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위나 권위는 오랫동안 일정한 가치 기준을 유지해 온 곳에서 그 기준에 따라 성실히 봉사해 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다. 정해진 울타리 속에 머물지 않기를 선택한 사람에게 그 보상이 어울리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학제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은 때로 그가 드러내는 모험성과 특이성으로 인해 저널리즘의 주목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쳐 가는 관심일 뿐 지위나 권위의 확보와는 무관한 것이다.

  그렇다면 학제적인 활동을 꿈꾸는 사람들이 목표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기가 추구하는 일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기성의 논리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스스로 의미있게 여기는 일을 추구하여 작은 것이나마 유형의 결실을 맺을 수 있다면, 그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